<미디어오늘>


"김종인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2016년의 이 시기는 1970년대에 박정희가 ‘종신 총통’처럼 군림하던 때와는 전혀 다르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20일 <미디어오늘>에 쓴 <김종인, 지금이 ‘총통시대’인 줄 아는가> 글 내용입니다. 그는 이어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무너뜨린 민주질서를 제1야당인 더민주가 회복하려면 그 당 안에서 먼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당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만 76세인 김종인이 고령이라서 당 대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대표가 되려면 경선을 통해 되라는 것입니다. 


더민주는 민주정당입니다. 더민주는 국가 헌법과 같은 당헌에서 당 대표는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그런데 김종인은(자신은 추대를 요청한 일 없다고 함) 합의 추대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런 일이 없다면 누가 김종인 합의 추대를 주장할까요? 김종인은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문재인 전 대표가 삼고초려 할 때 비례대표 2번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고, 대선까지 당을 이끌어 달라고 했다는데"라고 묻자 "뭐 그건 실제로 나하고 그렇게 얘기했다"고 답했습니다.


문재인이 나에게 당대표를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문재인도 책임져야 합니다. 민주정당 당대표를 아무리 당 대표라고 해도 대표 자리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김종인은 비겁합니다.


더 황당한 것은 더민주 안에서도 합의추대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문재인을 끌어들입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21일 SBS 라디오 ‘한수진의 SBS 전망대’와의 인터뷰에서 "합의 추대라는 것도 완전히 버릴 카드는 아니다"라며 "어찌 보면 그럴 권한이 있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문 전 대표의 생각이 중요하다"며 문재인이 입장을 표명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원내대표가 이런 발상을 합니다. 문재인 대표를 심심하면 흔들었던 이종걸입니다. 심지어 40여일을 최고위원에 참석 조차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은 그렇게 흔들더니 김종인은 합의 추대할 수 있다면서 문재인을 끌어들입니다. 정말 비겁합니다.


더민주가 만약 김종인을 합의추대한다면 스스로 독재자 박정희가 종신 총통을 바랐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더민주가 독재자 박정희가 간 길을 가다니 더민주 지지자가 지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김종인도 합의추대보다는 당당하게 경선을 통해 대표에 선출되면 정통성도 더 확보할 수 있습니다. 몇몇 측근들 말 듣고, 합의 추대를 시도하는 순간 아웃입니다. 측근들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사심공천, 셀프공천을 하더니 이젠 셀프대표까지 합니까.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새누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천을 박근혜 대통령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비판하면서 이어 성공 가능성을 아주 낮게 봤습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진실한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들, 결국 박통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들이 환생한 거라 보시면 됩니다"라며 "이 시대착오가 가면 얼마나 가겠어요? 아버님도 오래 버티지는 못합디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는 "각하는 굳이 정당정치가 필요하다고 보지 않아요"라며 "당은 입법부가 아닌 청와대 출장소로서 통법부의 역할만 하면 된다고 믿는 거죠"라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회는 청와대 출장소밖에 안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아래는 글 전문입니다.



원내대표 날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공천 배제하고, 이제는 당대표까지 고립시켜 아예 대선후보로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치명타를 먹였습니다. 결국 청와대에서 나와도 당권만은 계속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제1당을 장악하는 것은 나라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결국 지금 벌어지는 공천 학살극은 사실상 장기집권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했던 그 일을 지금 이 시대에 가능한 방식으로 계속한다고 할까...


각하는 굳이 정당정치가 필요하다고 보지 않아요. 정당은 입법부가 아닌 청와대 출장소로서 통법부의 역할만 하면 된다고 믿는 거죠. 아버지한테 정치를 배웠으니, 정치적 교양의 수준이 딱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이 시대착오가 가면 얼마나 가겠어요? 아버님도 오래 버티지는 못합디다.


진실한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들, 결국 박통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들이 환생한 거라 보시면 됩니다.


이번에 청와대에서 아예 유승민과 김무성을 확실히 죽여버리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아주 노골적이잖아요. 유승민은 무소속 출마해도 아주 힘들게 싸워야 할 겁니다. 지금 태세로 보면 출마하더라도 낙마시키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같아요.


세상에, 내가 김무성 편을 들어주는 가능세계도 존재하는군요. 하여튼 우리 각하, 대단한 분입니다. 그 분 아니면 이런 이적(?)이 가능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회라면 국회의원 후보 선출의 원칙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나라에선 그 기준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죠? 이것이 비정상의 정상화입니다. 비정상이 졸지에 정상으로 여겨지게 된 거죠.



친박의 입장에선 이제 유승민 살려두면 큰 일 납니다. 유승민은 비굴한 생존자 김무성과 달리 청와대의 전횡에 당당히 맞선 용사로 여겨지고 있거든요. 살려 두면 당내 비박은 물론이고, TK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수도권 여권 지지자들의 구심이 됩니다.



게다가 유승민은 여권의 주자들 중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토정서가 가장 약합니다. 그러니 살려뒀다간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할 수밖에. 이미 여권 내의 지지율이 김무성과 거의 같아졌죠? 김무성은 이미 가라앉고 유승민은 막 떠오르는 중입니다.


게다가 자기들이 유승민한테 했던 짓이 있잖아요. 얼마나 못 된 짓 많이 했나요? 그러니 유승민이 여권의 대선주자가 되면, 그 분들 밤마다 잠 못이루실 겁니다. 물론 그 모든 사태의 배후인 각하도... 그래서 저렇게 대놓고 죽이려 하는 거겠죠.


이한구, "어명이다. 사약을 받으라." 유승민, "불가하오. 차라리 제 목을 치심이 합당하다고 아뢰오." 이거 뭐, 조선시대 사극도 아니고...21세기에 대체 이게 뭔 일이래?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테러방지법,박근혜정권 몰락 전조

박근혜 2016.03.04 07:00 Posted by 耽讀

 

'괴물 국정원 탄생'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국가정보원에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정보 수집, 조사, 추적 등 전례없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 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190시간이 넘는 사상 초유도 끝내 테방법을 막지 못했습니다. 야당은 왜 그토록 테방법을 반대했을까요?


'테러방지법 2조 1항'은 "테러란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외국정부의 권한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할 목적 또는 공중을 협박할 목적으로 행하는 행위"라고 명시했습니다. '2조 1항 가'에서는 "사람을 살해하거나 사람의 신체를 상해하는 경우"라고 명시했습니다. 테러 규정을 엄청나게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정권 반대집회 나갔다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면 한 순간 '테러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2조 3항 '테러위험인물'을 "테러단체의 조직원이거나 테러단체 선전, 테러자금 모금, 기부 기타 테러 예비?음모?선전?선동을 하였거나 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는 모호합니다. 한 마디로 국정원 마음대로 입니다. 법률은 원래 '명확성의 원칙'입니다. 이를 위배한 것이지요. 국정원이 테러위험인물이라 의심할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하여 출입국?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9조 1항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개인정보(개인정보 보호법상의 민감정보를 포함)와 위치정보를 개인정보처리자와 위치정보사업자에게 요구할 수"-9조 3항

"국가정보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 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9조 4항


국정원에 의해 '테러위험인물'로 의심 받으면 이 되면 국정원에 의해 통신기록은 물론, 금융기록, 위치정보, 사상·신념, 노동조합·정당 가입·탈퇴, 정치성향 정보를 수집당할 수 있고, 심지어 건강, 성생활 따위도 국정원이 볼 수 있습니다. 


테방법은 헌법 제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 헌법 제 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헌법 37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를 위반한 것입니다. 국민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법입니다. 선진국은 더 철저합니다.


 "스위스 연방은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나라의 안전과 독립을 수호한다. 스위스 연방은 공동의 복지, 지속 가능한 발전, 내적 유대,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킨다. 스위스 연방은 모든 시민에게 가능한 최고의 수준에서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스위스 연방은 자연 자원의 장기적 보존을 지키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 질서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스위스 연방 헌법 1조.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독일연방 헌법 1장 1조

 


테방법이 많이 어떤 법과 많이 닮았습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1975년 5월13일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든 긴급조치 완결판인 9호입니다. 9호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  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가 핵심입니다. 긴급조치로 수많은 사람을 박정희는 탄압했습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위헌 선고 이유입니다.


"(긴급조치 1,2호)는 입법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고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참정권,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신체의 자유,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침해한다"

"(긴급조치 9호)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헌법개정 주체인 국민의 주권행사를 제한한 것으로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


그럼 박정희는 영원한 집권을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몰락했습니다. 시민 자유와 인권를 짓밟는 정권은 반드시 망합니다. 박근혜정권은 테방법을 통해 국민을 안전 보호할 수 있다고 하지만, 국민감시법, 국민사찰법입니다. 결국 몰락할 것입니다.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월10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며 "정부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담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국민들께 약속드린 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역량있는 집필진 구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박근혜정권은 시민 50-60%가 반대하지만 역사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하고, 자신들이 검인증한 교과서가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았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시작했던 역사 국정교과서가 부활하고 있습니다. '올바른'이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교과서는 '올바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올바름'으로 판단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북한이 국정교과서를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그들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특히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다시는 일제식민지와 독재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근혜정권은 우리 역사를 위대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지금 삶이 '헬조'이라고 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진 정치인도 있습니다. '무상급식' 때문에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새누리당 오세훈은 "요새는 '헬조선' 등의 표현도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젊은 사람들 가슴 속에서 자긍심을 찾아볼 수 없다'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정말 배부른 소리입니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은  '해방'됩습니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이 땅은 친일부역자들과 그 후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견고하게 대한민국 지배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한국 학술연구 분야 제3세대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김동춘 교수는 그동안 연구자·사회운동가·정부 관리라는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기억 창고를 차곡차곡 채워왔습니다.  

 

마침내 대중들을 향해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대한민국은 왜?>(사계절)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노정을 거슬러 오르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합니다.

 

출판사는 <대한민국은 왜?>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마주한 정치·사회의 여러 문제, 특히 보통의 국민이 겪는 고통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정치적 맥락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책이라고 합니다.

 

김동춘은 대한민국을 첫째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본 과제다. 개화·독립·민권 국가 수립이 좌절되면서 친일파의 주도로 근대화가 시작됐고, 해방 후 이들은 통일을 포기하는 대가로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자리를 지켰다. 둘째는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이다. 특히 1950년 10월 황해도에서 벌어진 '신천학살'을 겪으면서 남한은 '월남자들이 만든 나라', 기독교 반공주의가 국교인 나라가 됐다. 마지막은 한국 근대의 성격이다. 한국의 근대는 외세와 분단의 압박 속에서 진행되었고, 그 결과 경제는 성장했지만 이상과 희망은 제거된 반쪽 국가라는 세 가지 '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김동춘은 이 틀 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대한민국을 주도해온 친일-친미-반공-성장 세력 본질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이 책은 이미 짜인 근대화론에 맞춰 쓴 역사가 아니라, 처음으로 시도되는 '한국 근현대사 위에 다시 쓴 근대화 이론'이기도 하다고 출판사는말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식민지의 친일 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친미를 선택하고 반공 세력이 경제성장에 목을 맨 이유 등 '대한민국'을 기획한 세력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친일 1910~1945: 일본의 성공이 곧 조선의 구원이요 기회

(ㄱ). 조선의 독립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 애족적이고 인민의 복지에 호의적인 관심을 가진 더 나은 정부(일본)를 가진다면 다른 나라에 종속됐다 해도 재앙은 아닙니다.
(ㄴ).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며 (…) 이조 500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우리 민족에게는 시련과 고난이 필요했다.

(ㄱ)은 1889년 12월 28일 윤치호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고, (ㄴ)은 2014년 국무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문창극의 발언이다. 둘 사이에는 120년이 넘는 시간 차이가 존재하지만, 내용은 한 사람의 것처럼 똑같다. 이처럼 ‘친일’은 사라진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앞에 전복됐고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선인 가운데 망국을 슬퍼하지 않고 일본이 지배하는 ‘개화 세상’을 기회로 여긴 이들이 있다. 친일 세력에게 식민 지배는 조선의 종주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윤치호다. 윤치호는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제국의회 칙선의원이라는 조선인에게 허락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에게는 3?1운동조차 어리석은 일에 불과했다. 반면 독립.민권 세력, 특히 안중근 같은 급진파의 저항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2. 친미 1945~1950: 점령군의 깃발 아래서 다시 기회를 잡다

(ㄱ). 반도의 남반부에서나마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방 미국의 은혜이며 (…) 한국 국민, 그리고 우리 자손들은 미국의 온정에 대한 사의를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ㄴ). 언제부터인가 ‘광복절’의 기년을 1948년 대신 1945년에 맞춤으로써 광복이라는 말이 가지는 참뜻이 상실되고 역사적 기억에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ㄱ)은 1949년 6월 8일 이승만 대통령 담화의 일부이고, (ㄴ)은 2015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인호 KBS이사장이 발표한 글이다. 둘 사이에서도 시간을 뛰어넘는 동질성을 찾을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 곧바로 38선 이북 지역을 소련의 군대가 점령했고, 9월 8일 미국의 군대가 38도 이남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예속이 시작됐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미소 양국에 분할 점령된 조선은 백성의 권리와 자주독립이 보장되는 새 국가를 건설할 힘이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운명은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의 의지에 따라 결정됐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절멸의 위기를 맞이했던 친일 세력은 미군의 통치에 발맞추어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기사회생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장악한 재화와 산업?생산 시설을 바탕으로 독립 세력을 제압하고 ‘애국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3. 반공 1950~1970: 반공의 시녀가 된 자유와 민주

(ㄱ). 한국민들이 자기 집이 파괴되는 것을 묵묵히 참고 차라리 가옥이 파괴될지언정 적에게 나라를 뺏기어 독립된 국가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원치 않는다.
(ㄴ). 금년에 북한 공산 집단이 무모한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해 (…) 국민 모두가 전사라는 결의를 다져야 한다.

두 문장의 주인공은 이승만과 박정희다. 둘은 13년, 18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영구독재를 계획했다. 이들의 독재를 유지시켜준 전가의 보도가 바로 ‘반공’이다.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민중이 공산주의 공포증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자에게 대중의 공포는 이용하기 좋은 먹잇감이 됐다. 이승만 시절에는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이 휘두른 칼춤이 강산을 피로 물들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비롯해 대통령의 정적 제거, 간첩 조작 등이 그의 손으로 진행됐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아예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들은 간첩으로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권력이 외부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사상과 행동을 자기검열하게 한 셈이다.

4. 성장 1970~2015: 영원히 반복되는 선先성장의 신화

(ㄱ). 경제가 잘되어야 국민이 배불리 먹고 등 따듯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ㄴ).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ㄱ)은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을 설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던진 질문이다. 꼭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보이는 (ㄴ)은 작가 김훈이 2015년 1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대한민국이 이룬 경제 기적의 배경에 미국의 1970년대 동아시아 전략과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지만, 주류 세력은 여전히 박정희의 지도력만을 강조한다. “박정희 시절이 가장 좋았다”는 말이 지금도 그들을 떠받치고 있다.
1949년 10월, 반민특위가 해산당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기업주들도 모두 풀려났다. 이후 그들은 정부의 지원과 특혜를 받으면서 몸집을 키웠다. 정치권에 선을 댄 기업들은 원조 물자를 독점하고 정부가 보유한 외환을 대부받으면서 재벌로 변신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 일본의 사과와 배상 요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청구권 자금’을 받았다. 경제 개발을 위해 과거사 청산의 뚜껑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 돈은 고스란히 재벌 기업으로 흘러갔다.

그럼 떠나야 합니까? 박근혜와 그 세력들은 '위대한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젊은들이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떠나야 합니까?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동시대 지식인의 기록이며, 이 땅의 시민들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국가에 대한 참회록인 <대한민국은 왜?>가 그 작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친일의 후예이고, 친미의 후예이며, 반공과 성장의 후예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 절망한 이들이 읽어야 합니다. 아프지만 절망하지만 읽어야 합니다. 아래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김동춘은 "돈·지위·인맥 등 강력한 밑천을 가진 이들 부일 세력, 재력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해방' 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8·15 이후 한반도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사를 굴절시킨 식민지의 유산은 바로 이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나아가 "일제의 조선 지배에 협력하다가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면서 절멸의 위기를 맞이했던 부일 협력 세력은 미군의 통치에 발맞추어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다"면서 "일제강점기의 행적이 떳떳치 못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계속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 주장해왔으며, 최근에는 아예 그날이 사실상 '광복'일이라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친일부역세력 후손들이 1948년 8월15일을 광복일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ㅅ급니다. 다음 글은 친일부역세력들이 왜 그토록 이날을 광복일로 삼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새기고 새겨야 할 말입니다.

 

급기야 2015년 8월 15일에는 ‘광복 67주년’이라고 플래카드까지 내걸었다. 1945년 8월 15일, 즉 조선의 온 백성들이 환호했던 그날은 부일 협력 세력에게는 악몽과 같은 사망 선고일이었지만,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1948년 8월 15일은 그들이 기사회생한 날이었다.(67쪽)


친일부역세력 후손들은 '반공'을 입에 달고 삽니다. 비판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갑니다. 역사를 말하면서 진영논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김동춘은 "서청 등의 극우 청년 조직은 제주4·3사건에도 투입되어 테러와 학살로 악명이 높았고, 각종 정치 테러에 동원됐으며 여운형·김구 등의 요인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이 짙다. 이렇게 반공투사를 자처한 월남자들은 휴전 이후 오늘까지 대한민국 사회를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글에서 확인합니다.

 

독재정권은 자신들 권력 유지 방법을 "'반공'을 핑계로 정적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유지했고, 박정희 정권은 아예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다"고 말합니다. 이들 든든한 후원 세력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김동춘은 기독교가 '횃불 장작'이라면서 "'인간해방'의 이념으로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식민지 지배를 받던 백성들에게 인권과 정치적 자유 등의 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고 주장합니다. 결과는 기독교 부흥입니다.

 

그 결과 1900년에 1만 명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 신자가 1940년에 이르러 35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불어났고, 해방 이후에는 세계 기독교 선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선교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양적 팽창의 뒷면에는 권력과의 타협 혹은 권력의 위협이라는 그늘이 자리 잡고 있다. 사상적 이유로 이승만·박정희 정부의 의심을 받던 사람들은 교회나 성당에 나감으로써 ‘신원 보증서’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피학살자 유족들과 월북자 가족들도 남한에서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교회에 나갔다. 제주4·3 당시 좌익으로 몰려 군과 경찰에 학살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국군에 자원입대해서 면죄부를 받으려 했던 행동과 비슷하다.(131~133쪽)

반공국가 대한민국, 기독교 국가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미국이다. 이승만이나 장택상, 조병옥 등 미국에서 유학한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을 맹신했다. 미국을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를 지원하는 우방국가, 동맹국가를 뛰어넘어 ‘피로 맺은 형제’로 격상시켰을 정도로 한국의 집권 주류 세력은 미국에 목을 맸다.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한 것도 미국이고, 인권 외교라는 이름으로 박정희 독재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미국이었기 때문에, 대중 역시 미국을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믿고 있었다. 바로 이 반석 위에서 미국은 그들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 한국 현대사를 좌지우지했다. 단순히 한국 정권을 조정하고 경제를 장악한 것에 그치지 않고, 36년간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 문제까지 매듭지어버렸다. 

시민의 고발이나 노조 활동이 죄악시되는 나라,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생존할 수 없었던 과거의 ‘병영국가’가 오늘에 와서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종업원 혹은 ‘고객님’으로 불리는 ‘기업국가’로 변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 군부 엘리트가 권력층에서 탈락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이지만, 재벌이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 언론을 사실상 소유하게 되었고 법원과 검찰도 그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배질서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265쪽)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YS, 박정희 독재 몰락을 재촉하다

정치 2015.11.24 07:00 Posted by 耽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설하는 통일 민주당 김영삼 후보 <경향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하다. '민주화 거목',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했다는 이라는 평가를 하는 이가 있는 반면, '3당야합, 'IMF'를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경찰국가','병영국가'로 만들었던 독재자 박정희 몰락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YH사건'이다.

YH 무역회사는 가발수출업체였다. 1970년대 초 가발은 우리나라 효자 수출품목이었다. YH무역은 1970년 직원이 4000명에 달했고, 한 때  수출 순위 15위에 올랐다. 하지만 가발은 이내 사양업이 되고, 경영진은 외화를 국외로 도피했다.

 

박정희, YH무역 노조원 강제 진압 위해 신민당사에 공권력 투입

 

경영진은 결국 1979년 3월 30일 회사를 폐업했다. YH무역 노동자들은 "폐업공고의 철회"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9일 'YH무역' 여공 187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은 지난 2013년 8월 30일 <한겨레>[길을 찾아서] 'YH노조 신민당사 농성장에 진압작전' 제목 글에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조합원들은 준비해 간 펼침막을 들고 농성에 들어갔다. '우리에게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냐',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말했다.

 

눈길을 끈 것은 당시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이 이들을 적극 보호했다는 것이다. 이총각에 따르면 김영삼은 "6명의 와이에이치 노조 대표와 먼저 만난 뒤 4층 농성장을 직접 찾아가 조합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무력 진압했다. 이틀 뒤인 11일 새벽 2시, 정사복 경찰 등 1200여 명이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 투입됐다. 경찰은 YH무역 여공 187명을 곤봉·벽돌·쇠파이프 따위를 동원해 폭력진압했다. 여성 근로자 10여명, 신민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이 부상을 입었고, 여성 노동자 김경숙씨가 떨어져 숨졌다. 경찰은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추락사라고 밝혔다. 이총각 노조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겨우 눈을 붙이고 깜빡 잠이 들었던 농성 노동자들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깨어나, 불시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맞고 차이면서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일부 노동자들은 주먹으로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려고 했고 사이다병을 깨들고 저항해봤지만 경찰의 폭력적 제압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왔다. 김영삼 총재 이외 국회의원들과 당원들 역시 무차별적 폭력에 실신 상태가 되었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끌려나갔다.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코뼈에 금이 가도록 두들겨 맞고 사진기와 필름까지 뺏겨야 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_-2013.09.02 <한겨레> [길을 찾아서] '끌려나온 노동자들 퇴직금 강제 수령'

 

'YH사건'을 본 이총각 위원장은 "결국 정권의 야만적인 폭력은 또 하나의 민주노조를 쓰러뜨리고, 아직 청춘을 활짝 펴보지도 못한 여성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면서 "총각은 이 인면수심의 정권이 오래가지 못 할 것이라는 확신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고 말했다.

 

야당 당사 공권력 투입....박정희 정권 몰락 불러

 

 

 

YH노조원들과 끌려 나오는 김영삼

 

이는 현실이 됐다. 이후 독재자 박정희는 김영삼을 제명했고, YH노조를 폭력진압한지 두 달만인 그해 10월 26일 부하인 김재규에 총에 맞고 죽었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경찰을 투입한 것과 관련해, 'YH사건'을 누리꾼들이 떠올린 이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김영삼이 보인 행동이다. 사실 YH무역은 중소기업이다. 신민당이 당 운명을 걸만큼 노조원들을 지켜주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이 사건이 박정희정권 운명을 가름할 수 있는 중대사건임을 알았다. 김영삼은 당사를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산업발전의 역군이며 애국자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2013.08.19 <동아일보> '불통' 박정희 정권, 신민당사 농성 YH여공들 강제진압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2000년)에는 "사실 당시 신민당의 처지로서는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준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면서 "하지만 나는 이 불쌍한 여공들을 내몰면 더이상 갈 데가 없고 극단적인 사태도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2013년 4월 20일 <한겨레> '이철승의 신민당사? 농성하러 가지도 않았으리'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잠자리에 들자 김영삼은 당사 정문으로 내려가 '여공들이 흥분하니 모두 물러나라'고 요구했다"면서 "경찰들이 이에 응하지 않아 실랑이를 벌이던 김영삼은 '너희들이 정말 저 여공들을 뛰어내리도록 할 참이냐'며 마포서 정보과장의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김대중과 노무현만큼 몰라도, 현 야당 의원들이 김영삼 역할은 해야 한다. 박근혜정권은 이미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정권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저항해야 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결기를 보인 김영삼 정도는 해야 민주주의 신봉자다.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YS어록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정치 2015.11.23 07:00 Posted by 耽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설하는 통일 민주당 김영삼 후보 <경향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습니다. 한몸에 한국 현대정치사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했습니다. 한국 민주화 투쟁 상징이었지만 노태우-김종필과 3당합당은 권위주의 세력과 손 잡는 변절이었습니다. 문민정부를 탄생시켜 독재자 박정희 이후 군부 독재정권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임기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받기게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사평론 김용민 씨 말처럼 "이명박과 박근혜 씨는 지금까지의 행적 아니 행각으로는 죽어서 대접받기 힘들 겁니다. 덕을 끼칠 수는 있겠네요. 쌀 소비와 방앗간 매출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두 인간에 비하면 위인이자 영웅"입니다. 그가 남긴 어록들입니다. 김대중-노무현 때보다는 덜 하지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그를 생각하니 마음 한 켠 아픕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그 신문이 장 총리의 마음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탄압했다면 장 총리는 과거 이 정권에 의해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하던 때를 상기하라”

(1961년 3월, 장면 정부의 민족일보 인쇄중지를 비판하며)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패배 직후)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1973년 9월 24일, 국회 대정부질문,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규명 촉구하며)

“역사의 진로를 민주회복으로 바꾸어야 할 시점이 지금이라고 확신하며, 정부는 이제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

(1978년 7월 23일, 국회 연설)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

(1979년 6월 4일, 동아일보 인터뷰. 5·30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 강제진압 항의 기자회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

(1979년 10월 4일, 헌정사상 첫 의원직 제명 뒤)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1983년 5월 29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입원)

“군정을 학실히(확실히) 종식시키겠습니다.”

(1987년 대선 유세에서)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1993년, 하나회 척결 등 개혁 반발에 대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11월 14일, 한·중 정상회담 후 회견에서 일본 각료들의 망언들에 대해)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1998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습니다.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습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2009년 8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이상 <경향신문>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타임>은 수치를 '투사'로 박근혜를 '독재자 딸'로 표현했습니다. 

 

미얀마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 총선 압승이 예상됩니다. 헌법상 군부가 의회 권력과 무관하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국민 70% 이상이 지지하는 민주화의 열망을 또다시 파괴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두 사람을 한 번씩 표지에 실었습니다. 2011년 1월10일치엔 수치를 ‘투사’라는 표제 아래 ‘자유 없는 나라를 비추는 자유의 횃불’이라는 부제와 함께 실었습니다. 2012년 12월7일치엔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이란 표제 아래 '아버지가 남긴 스캔들과 과거를 넘어설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수치는 미얀마 민주주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지만, 오히려 박근혜는 더 퇴보하고 있습니다. 반민주, 반역사, 반언론, 반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글이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지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래 글은 지난 2012년 4월5일 제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대한민국 봄하늘이 '분신'으로 활활 타오을 때인 1990년 5월, 그는 조국 인민들이 직접 몰아준 표로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495석 중 392석을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군사 정권은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민심에 놀란 군사정권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를 가택연금 시켰다. 30년 전 박정희가 민주헌정을 유린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든 것처럼, 그의 조국 쿠데타로 집권한 자들 역시 인민의 민의를 철저히 배반한 것이다.

 

1990년 이후 22년이 흘렀다. 아무리 숭악한 독재권력이라고해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인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더 이상 억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인민 앞에서 섰고, 인민은 그를 택했다.

 

미얀마 독립 영웅 딸이면서 민주화 상징 수치 여사

 

그는 미얀마 민주주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사진, 출처 <연합뉴스>)다. 수치 여사는 지난 1일 치러진 미얀미 총선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 AFP 통신은 2일 미얀마 국영 방송이 전한 선관위의 중간개표 현황을 인용해,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이 후보를 낸 44개 선거구 가운데 수치를 포함해 40곳에서 의석을 확보했다고 전했다고 <한겨레>는 보도했다.

 

수치 여사는 승리 일성을 "이번 선거는 국민민주연맹의 승리라기보다 이 나라의 정치(민주화)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한 국민들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아직은 먼 미래이지만 미얀마 민주주의 미래를 더 이상 군부에 맞길 수 없다는 인민의 열망이 수치 여사를 택한 것이다. 이제 미얀마는 수치 여사의 두 어깨에 달렸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미얀마 인민들이 22년만에 수치 여사를 다시 선택한 것은 그 동안 그가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믿음때문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미얀마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으로 독립에 가장 큰 공헌을 했지만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여섯 달 전인 1947년 7월 19일 정적에게 암살 당한 아웅 산  딸이다. 미얀마 인민들은 아웅산을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독립운동 영웅의 딸로 태어난 수치 여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고, 그런 그를 군부는 가택연금과 온갖 방해공작을 통해 억압했다. 연금과 공작을 통해 군부독재정권은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게 했다. 수치도 군부독재의 탄압에 두려웠을 것이다. 독재권력은 총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인민들을 억압한다. 수치 여사도 "공포로부터 자유"하라고 역설했다.

 

수치 "공포로부터 자유"하라 했건만, DJ도 죽음이 무서웠다

 

수치 여사가 남긴 연설 중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 제목 연설은 가장 유명하다(위키백과 '아웅 산 수치')

 

정적들을 어떤 때는 죽음이라는 공포로 위협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독재자인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그랬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 1>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물속에서 쇳덩이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바닷속이니 몇 분이면 모든 것이 끝날거야. 고통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고단한 삶도 끝이 날 거야. 어떤가. 이 정도 살았으면 된 것 아닌가."(<김대중 자서전1> 311쪽) 

 

"그럼에도 죽음의 공포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언제 나를 사형장으로 데려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430쪽)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런 공포를 신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극복했다고 말했다. 독재자들은 인민들을 폭압을 통해 억누르면 굴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민은 잠깐은 총칼을 두려워하지만 저항을 통해 승리한다. 수치 여사가 22년만에 승리한 이유처럼. 2012년 4월 대한민국은 '불법사찰'이라는 반민주, 반인권이라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마지막 폭압정권인 전두환 독재정권이 끝난지 25년만에 다시 불법사찰이라는 망령이 부활할 것이다.

 

연예인 사찰,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간 증거

 

방송인 김제동씨는 "국정원 직원을 두 번 만났다"고 했다. 김미화씨는 3일 파업중인 노조원들이 제작하는 '제대로된 뉴스데스크'에서 "김제동과 같은 시기인 2010년 중반쯤 국정원 직원이 2번 찾아왔다"고 "(직원이) VIP가 나를 못마땅해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사회 봐서 좌파로 본다는 말도 들었다. 집까지 왔었는데 도청장치라도 했나 싶어 어제 사실은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김제동씨 관련 보도 보고 소름끼쳐 잠이 안 왔다"고 말했다.

 

신경민 민주통합당 대변인도 "제가 앵커에서 쫓겨날 때도 저에 대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폭로했다. <오마이뉴스>는 신경민 대변인은 "촛불집회 즈음해서부터 내 코멘트를 문제 삼는 정부내 여러 움직임이 감지됐다, 당시 MBC를 출입하는 관선기자(기관원을 칭함)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심하라고 얘기를 자주했다"며 "특히 '당신도 애 키우고 가족 있는 사람인데 조심해라'고 얘기도 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소설가 공지영씨는 3일 자신의 트위터에 "김제동 몇년전부터 무대 올라가는게 공포스럽다고하더군요"라며 "김제동 약없이는 잠들지 못합니다. 김제동, '혼자 대구서 보따리 싸가지고 올라와얼결에 성공한 촌놈'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맘이 찢어집니다"라며 김제동씨가 껶었을 공포감에 치를 떨었다.

 

김미화씨는 "김제동씨 관련 보도 보고 소름끼쳐 잠을 못잤다"고 했고, 신 대변인은 "당신도 애키우고 가족 있는 사람"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사찰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세 사람 폭로만해도 이명박 정권은 '공포정권'임을 증명했다.

 

박근혜 "나도 사찰 당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묻고 싶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사진, 출처 <오마이뉴스>)은 지난 1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에서 열린 박민식 후보 지원유세에서 "저에 대해서도 지난 정권, 현 정권 할 것 없이 저를 사찰했다는 언론보도가 여러 번 있었다"고해 자신도 사찰 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박 위원장을 사찰했다는 물증은 없다.

 

권력이 죄 없는 사람을 사찰하는 이유는 비판세력 재갈물리기만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범죄행위다. 아무리 강단있는 사람이라도 국가권력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으로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런 행위는 박 위원장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원조다. 물론 박 전 대통령 사찰 책임을 박 위원장 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 후광은 다 가지면서 지은 범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박선숙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이 잘 지적했다. 박 사무총장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불법사찰은 사찰이라는 범죄행위에서 끝나지 않고 뒷조사한 자료로 협박해 사람들을 직장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재산을 빼앗은 중대 범죄 행위"라며 "권력을 보호하고 이권과 자리를 챙기려 한 불법사찰의 진상, 마치 군사정권 시절 하나회를 연상시키는 사조직을 만들어 전방위적으로 국민을 뒷조사했던 이유가 모두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증거하는 박정희 정권 사찰

 

박정희 독재시절 얼마나 많은 뒷조사를 했는지 <김대중 자서전 1>에 나온 사찰 증거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결혼 전 중앙 정보부가 만들어진 후 평소 알고 지내던 목포 출신 정보부원이 찿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군사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의심스러워 속내를 감추고 딴전을 피우며 응대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내 짐작대로 녹음기를 품고 정치인들의 의중을 떠보고 다녔다.(150쪽) 

 

1971년 1웛 2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집 마당에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각적으로 이 음모가 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것임을 알았고 전형적인 짜 맞추기 수사로 오로지 우리 집 주변 사람들만을 샅샅이 조사했다.(231쪽) 

 

1971년  5월 25일 실시하는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전국을 누비며 유세장을 찾아 다녔다. 투표 전날, 목표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왕복 2차선 국도에서 거대한 화물 트럭과 충돌사고이 있었다. 택시 운전사를 포함 2명이 숨지고, 3명은 크게 다쳤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나중에 붙잡힌 운전기사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지만 돌연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좌천을 당하고, 바뀐 검사는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로로 처리해 버렸다.(258쪽) 

 

1971년 7월 총재 선거에서 패하였지만 국민적 열기는 대단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로 인한 피로감과 자동차 사고 부상 등이 한꺼번에 겹쳐 몸도 마음도 아팠다. 이런 처지에 있었건만 정부와 여당은 나를 매장시키려 했다. 박 대통령의 경쟁자로 나서지 못하게 만들기위해 이딜 가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미행하며 나를 감시했다. 우리 집 전화는 24시간 도청당했다. 그들은 내 집 주위에 있는 집 몇 채를 빌려서 종일 감시했다. 언론에서 '동교동'이라 칭했던 우리 집 골목은 한마디로 살벌했다.(265쪽)

 

국가권력이 자신을 24시간 감시한다는 생각을 해보라. 끔찍하지 않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항상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불렀다. 독재는 곧 억압과 공포를 통해 정적과 인민을 탄압했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독재자 박정희 정권은 이름만 민주공화국이지 '병영국가'였다.

 

박근혜, "공포로부터 자유"를 허할 준비가 되었는가

 

연좌제는 안 되지만 박근혜 위원장은 어머니 육영수씨 사후 약 5년 동안 퍼스트레이드 역할을 했다. 당연히 국정에 어느 정도 참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대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정희 정권은 공포가 지배한 병영국가였다. 수치 여사는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면서 여기서 자유하라고 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더 이상 권력이 짓누르는 공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불법사찰로 목을 조일지라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묻고 싶다. 박 위원장은 공포로부터 자유를 허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도 사찰 당했다"는 강변이 먼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던 그 때 그 공포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먼저다. 

 

 

 

 

 

전국역사학대회장 양호환 서울대 교수(종이를 든 이)등 참석자들이 30일 오전 전국역사학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문화관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고 역사학 교수들의 국정 역사교과서 제작 불참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안,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방해하고 있다.<한겨레>

 

"반역자" "지적 장애인", "나라 망치는 일" "국가 반역자를 가장 많이 길러낸 서울대를 폐교하고 재설립해야 한다"

 

지난 29일 서울대에서 열린 역사학계 가장 큰 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 고엽제전우회와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보수단체들이 들이닥쳐 쏟아낸 막말들입니다. 이들은 "전국 교수사회가 동물적으로 '국정화 반대' 행동에 동참했다. 교수사회의 이성에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반지성 집단광기가 지식테러로 대학을 점령하고 있다"며 맹비난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서울대가 단일 대학으로는 가장 많은 382명의 교수가 참여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을 낸 것을 두고 "존경받는 서울대 교수는 없고, 지식 팔이 지적 장애자들만 넘쳐난다"며 "나쁜교과서를 만든 나쁜 교수들의 본산, 반역자를 가장 많이 길러낸 대학이 서울대라면 '서울대 폐교론'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고민해 봐야한다'며 서울대 폐지까지 주장했습니다. 우익세력이 학자들 성명 발표장까지 난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 정권 말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1958년 대법원 아수라장 만든 대한반공청년회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30%라는 지지를 받아 이승만에게는 가장 큰 정적이었던 죽산 조봉암. 검찰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그를 간첩죄로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2일 1심 재판부(재판장 유병진)는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죄' 부문에서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1심재판부가 조봉암을 간첩죄 부문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자 사흘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의 '대한반공청년회' 200명이 대법원에 난입하여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 죽산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고,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죽산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가 간첩죄는 무죄라고 했으니 이승만으로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대한반공청년회 같은 정치깡패가 있었고, 야당이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면 무조건 잡아가고 반공청년회가 대법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도 눈을 감아버리는 경찰이 있었습니다.  

 

결국 2심과 대법원은 이승만에게 충성을 표시하여 간첩죄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1959년 7월 31일 죽산을 죽여 버렸습니다. 1심에서 간첩죄 무죄판결이 난 지 1년 만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죽산만 제거하면 영원한 대통령이 될 줄 알았지만 불과 아홉 달 후 4·19혁명으로 하야했습니다.  

 

그런데 55년이 지난 오늘 그런 일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빨갱이'나 '좌편향'으로 몰아 색깔론으로 단죄한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 하나 그런 독재정권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민주시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자 박정희도, 1972년 유신쿠데타와 긴급조치 그리고 1979년 YH사건, 김영삼 제명과 부마항쟁으로 긴 독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승만,박정희,박근혜 <한겨레>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5년 1월19일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ㅣ연합뉴스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선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1월1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역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한 말입니다. 이랬던 박근혜가 27일 시정연설에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라며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역사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때는 역사는 학자 판단에 맡겨야 해놓고 자신이 집권한 후에는 정권이 국정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만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이게 박근혜 자신이 한 말이랍니다. 이거 뭐 정신분열증도 아니고...."라고 직격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지난 2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가 친북이거나 또 좌편향의 내용이 있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고, 이 부분에 대해서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들 미쳐가는구나. 지금이 바로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나설 때"라며 "주인인 국민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되고 급기야 머슴이 '국정화 반대하면 주인 아니다'라는 희대의 X소리까지 한다. 너희들이 주인이고 국민은 지배대상이라는 것이겠지. 국민이 반대해도 강행하겠다니 이 나라가 언제 공화국에서 여왕이 지배하는 절대군주국가로 바뀌었는가"라고 직격했습니다.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한국사 교과서가 병들어 있다. 병을 고쳐야 하듯이, 우리는 병든 한국사 교과서를 고쳐야 한다"며 박근혜정권이 통과시킨 현행 교과서를 '병든 교과서'로 폄하하는 자학(?)을 범했습니다. 같은 당 김진태 의원은 "길지 않은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게 좌파(의 주장)는 모두 거짓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위와 진실과의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검인정제가 계속된다면 우리 학생들은 민중 혁명의 땔감밖에 안 된다", "현행 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가 옳은 길이라고 가르친다", "민중사관 숙주 노릇 안 된다" 등 검정 교과서에 친박·종북 색깔론으로 덧칠했습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22일 오전 새누리당이 '올바른 역사교육 원로에게 듣는다'란 주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간담회에서 "학생들은 이 상품(교과서)을 거부할 권리도 없고 힘도 없다. 받아 마셔야 한다. 학생들 뇌에 독극물 심어주는 것"이라며 "이걸 계속 받아마시게 하지 않는다고 국사학자들이 들고 일어서 국정화를 하면 (집필에 참여)안 하겠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은 아무것도 안 하다 이제와서 절차가 어떻게 됐다(고 문제삼는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두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28일 <한겨레>에 쓴 글에서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이승만 정권 말기, 유신 말기가 그러했다"면서 "권력 유지의 욕망 혹은 권력 상실의 두려움을 가진 집권세력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가기관을 도구화하려다가 사고를 친 것"이라고했습니다.

 

 

이승만,박정희,박근혜 <한겨레>

 

 

 

 

 

 

 

 

 

 

 

 

아이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10월26일, 하얼빈과 궁정동 총성

정치 2015.10.26 07:00 Posted by 耽讀

 

박민일 전 강원대 교수가 본지를 통해 공개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직후 장면을 담은 그림엽서 사진출처 <강원도민일보>

 

10월 26일은 지난 106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두 번이나 역사를 뒤흔든 총성이 울린 날이다. 첫 총성은 106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36년 전 1979년에는 17년 대한민국을 독재로 휘두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된 날이다.

 

1909년 10월26일 이른 9시30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는 '탕' 하는 7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주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쓰려졌다. 원흉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서른살 조선 청년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의 러시아어) 외쳤다. 그 조선 청년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대한국인 안중근이었다.

 

일본은 왜 이토를 죽였는지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를 저격했다"고 말했다. 단순히 대한제국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고. 안중근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주의자로 전쟁을 통하여 오로지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하는 이토를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평화'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이다.

 

일제는 평화주의자 안중근을 용납할 수 없었다. 히로부미를 죽인 것만 아니라 '평화'를 말하는 안중근을 살려준다는 것은 조선과 만주 더 나아가 동양을 전쟁으로 집어 삼키려는 그들의 목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을 살려주면 이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일제는 안중근에게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내렸고  히로부미 처단 석 달 만인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시켰다.

 

이후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합병조약(合倂條約)을 강제로 맺었다. 조약을 맺은 당사자는 을사늑약 오적이었던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을사늑약도 고종황제가 없었듯이 합병조약도 순종황제는 없었다. 조약은 8월 29일 공표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다섯 달만이다.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라 부른다.

 

 

박정희 시해 현장검증하는 김재규

 

36년 전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는 동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동기였다. 그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가담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지만 결국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살하였다.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을 당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는 사살했는지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를 사살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부마항쟁을 그는 1980년 1월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이렇게 정리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봉기로서, (중략)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한겨레21> "김재규가 쏘지 않았다면"- 2009.10.23 제782호)

 

부마항쟁 시민들을 "탱크로 갈아뭉게 버리면 된다"고 했던 차지철과 다른 평가를 내린 것이다. 박정희 2인자로 군림했던 김재규마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유신 심장을 쏘았지만 아직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조갑제씨는 <조갑제 닷컴>에 올린 '10.26 사건 30주년을 맞아' 제목 글에서 박정희는 "사농공상의 구질서를 부수고, 상공농사의 새로운 질서와 사회구조를 만든 근대화 혁명가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깔아놓은 자유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조-자립-자유의 전략을 추진하여 내실 있는 자유를 만들었다"고 추어올였다.

 

이어 그는 박정희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면서 "청탁(淸濁)을 들여마시되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하였던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고 평했다. 조갑제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일은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우리 사회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수 많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독재자를 '초인'으로까지 추어올리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2009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박정희 독재 정권에 생명을 던지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려고 싸웠던 민주·진보 세력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박정희 유산을 완전히 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유산을 그리워하는 권력집단은 2015년 현재 또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박정희보다 더 교묘한 방법이다. 106년 전 하얼빈에 울린 총성은 평화를, 1979년 궁정동 총성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울렸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민족 원흉이자 반평화주의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과 김재규가 독재자 박정희를 사살한 이날 과연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할 일이 많음을 명심해야 한다.